강희덕 조각전 _ 일상 그리고 온유

2010. 10. 06 - 10. 20

 IMG_6827.JPG

 

진화랑 진아트센터에서는 10월 6일 부터 10월 20일까지 고려대 조소과 강희덕 교수님 조각전을 일상 그리고 온유라는 타이틀로

초대하였습니다.

 

3년만에 개인전을 준비한 출품작의 테마는 대략 두 부류, 즉 ‘일상’과 ‘온유’로 구분된다. ‘일상’이 그의 생활에서 경험한

풍경들을 테마로 한 것이라면, ‘온유’는 신앙적인 것을 테마로 하고 있다.

 IMG_8327_s.jpg IMG_8329_s.jpg IMG_8330_s.jpg

첫째 ‘일상’에서는 사각의 알미늄 프레임속의 새, 고양이, 강아지, 인형 등의 이미지들이 눈에 띈다. 부조로 제작된 이 작품들은

사실은 자전적인 줄거리로 되어 있다. 가령 프레임속의 새는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온 작가(그래서 주인공은 분필을 쥐고

칠판에다 무언가를 쓰고 있다)가 좀더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궁리한 끝에 훨훨 나는 새를 도입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구김살없이

드러낸 작품이며, 고양이가 등장하는 작품은 여인과 고양이가 서로 시선을 외면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는데 같은 공간에 있지만

사실은 단절되어 있는 현대인을 풍자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강아지가 등장한 작품은 작가를 유난히 잘 따르는 ‘베니’라는 시추 애완견을 그려낸 것이다. 이처럼 그의 ‘일상’에선

삶의 무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전개된다.

 IMG_8292_s.jpg IMG_8336_s.jpg IMG_8337_s.jpg standing 2.jpg

 

두번째 테마인 ‘온유’에서는 주로 신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강희덕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의 주조음(主調音)은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순결한 신앙이 그의 작품에 자양분이 되고 있고 예술에 군불을 지펴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치>에선 소중한 물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손을 맞잡고 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 물이 새지 않으려면 두손을 힘껏

모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결속과 보호의 손을 의미하기도 한다. 강희덕의 작품에서 손이 의미하는 것은 맞잡은 손에 물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공동목표는 물을 쏟지 않고 누군가가 마실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손은 조그만 틈이 벌어져서도

안되며, 잠시 한눈을 팔아서도 안된다. 그렇게 해선 소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일치’라고 불렀다. 분열과 갈등이 요동치는 사회에서 그는 평화와 화해를 말하고 있는 것같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하나됨의 실현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고난을 테마로 한 <십자가의 길>은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골고다언덕을 오르는 ‘고난의 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는 <십자가의 길>로 전시장 한 벽을 14점의 작품으로 채웠다.

 

 IMG_8299_s.jpg

 

이 이외에도 이번 전시에서 10여점의 작품이 더 전시될 예정이며 총 20여점의 신작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 10월 6일 오후 6시 오프닝을

시작으로 15일간 진화랑 진아트센터에서 전시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IMG_8276-1.jpg


마음을 어루만지는 손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서 성 록


강희덕은 2008년 개인전에서 손을 형상화한 석조작품을 발표했는데 필자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사람의 손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 손은 젊은 여인의 고운 손이 아니라 피부를 뚫고 나올 것같은 억센 힘줄, 굵은 손마디,투박하고 억센 손이였지만 누군가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손이었다.

전시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작품에 관한 기사가 모 일간지에 실렸는데 내용인즉 그 손이 작업중에 갑자기 마비증세를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온 강희덕을 치료해준 고려대 안암병원 외과의사 서중근교수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기사였다. 작가는 자신에게 정성껏 수술을 해준 서교수가 병실을 방문할 때마다 그 손을 스케치하였고 병원을 퇴원한 후에는 그때의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치료의 손’을 되살려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치료해준 주치의의 손을 작품화하였지만 그 손의 의미는 보는 시각에 따라  상심한 사람을 어루만지고 마음이 깨진 사람을 품어주는 사랑의 손으로 더 넓게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약인지 모르지만 필자는 강희덕의 작품을 볼 때면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두어라. 그러면 너는 사랑을 얻을 것이다”는 십자가의 성 요한(St.John of the Cross)의 말이 바짝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서로가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손이야말로 가장 생동감 있는 이미지가 아닐까.

작가는 3년만에 신작을 갖고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번의 출품작의 테마는 대략 두 부류, 즉 ‘일상’과 ‘온유’로 구분된다. ‘일상’이 그의 생활에서 경험한 풍경들을 테마로 한 것이라면, ‘온유’는 신앙적인 것을 테마로 하고 있다. 첫째 ‘일상’에서는 사각의 알미늄 프레임속의 새, 고양이, 강아지, 인형 등의 이미지들이 눈에 띈다. 부조로 제작된 이 작품들은 사실은 자전적인 줄거리로 되어 있다. 가령 프레임속의 새는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온 작가(그래서 주인공은 분필을 쥐고 칠판에다 무언가를 쓰고 있다)가 좀더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궁리한 끝에 훨훨 나는 새를 도입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구김살없이 드러낸 작품이며, 고양이가 등장하는 작품은 여인과 고양이가 서로 시선을 외면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는데 같은 공간에 있지만 사실은 단절되어 있는 현대인을 풍자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강아지가 등장한 작품은 작가를 유난히 잘 따르는 ‘베니’라는 시추 애완견을 그려낸 것이다. 이처럼 그의 ‘일상’에선 삶의 무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전개된다.

입체와 부조물이 한 피스를 이루는 <일상 11>는 세월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한쌍의 작품이지만 거기에는 서로 다른 세대가 마주하고 있다.  옷차림에서 보여주듯이 청바지에다 캐주얼 차림의 팔짱을 낀 인물(입체)은 청년을, 맞은편의 코트를 걸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인물(부조물)은 중년신사를 가리킨다. 두 인물은 서로의 미래와 과거를 각각 상기하는 듯하다. 패기만만한 청년은 머잖아 도시의 빠른 리듬에 발맞추는 중년의 소시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중년신사는 나도 한 때는 ‘빛나는 청춘의 훈장’을 달고 살았지 하며 아쉬움을 달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세월의 화살을 빗겨갈 장사는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는 일이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 또한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빠져나가고 싶지만 피할 길이 없을 때처럼 우수가 잠잠히 밀려오는 작품이요 먼 거리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약속의 땅>도 비슷한 맥락의 작품이다. 작품은 세 개의 덩어리로 되어있는데 맨 위의 것은 앳된 어린이 모습을, 가운데 덩어리는 청년의 모습을, 하단의 덩어리는 장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같이 세 개의 덩어리가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이뤄진 <약속의 땅>은 인간의 삶의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약속의 땅’이란 원래 성경에서 유래된 말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입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축복의 땅으로의 입성을 가리키지만 그의 작품에선 이전 세대의 땀과 희생에 의해 세워진 축복을 일컫는다. 이전 세대가 없었다면 현재는 존재치 않으며 그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보다 중요한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태어남과 자라남, 노화는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라기보다   창조적 신비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의 인도가 있었기에 인생이 설명되듯이 ‘오늘’이란 시간도 섭리의 간섭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상’ 연작은 대체적으로 작가가 본 생활의 단면이나 늙어감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면,두번째 테마인 ‘온유’에서는 주로 신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강희덕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의 주조음(主調音)은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순결한 신앙이 그의 작품에 자양분이 되고 있고 예술에 군불을 지펴주고 있다.

작품의 주 제목은 <일치Ⅰ><일치Ⅱ>,<십자가의 길>,<위로의 손>,<부활Ⅰ>,<부활Ⅱ>,<자비> 등이다. <위로의 손>은 종전에 해오던 ‘손의 연작’이며, 화강석, 대리석으로 제작한 <일치Ⅰ>,<일치Ⅱ>는 따듯한 정을 주고받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치>에선 소중한 물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손을 맞잡고 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 물이 새지 않으려면 두손을 힘껏 모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결속과 보호의 손을 의미하기도 한다. 강희덕의 작품에서 손이 의미하는 것은 맞잡은 손에 물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공동목표는 물을 쏟지 않고 누군가가 마실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손은 조그만 틈이 벌어져서도 안되며, 잠시 한눈을 팔아서도 안된다. 그렇게 해선 소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일치’라고 불렀다. 분열과 갈등이 요동치는 사회에서 그는 평화와 화해를 말하고 있는 것같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하나됨의 실현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고난을 테마로 한 <십자가의 길>은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골고다언덕을 오르는 ‘고난의 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는 <십자가의 길>로 전시장 한 벽을 14점의 작품으로 채웠다. 원래 십자가란 로마에서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처형하는 사형도구로서 그 형틀을 자기 등으로 메고 가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세우는 무서운 형벌을 일컫는다. 작품에서 메시야는 정죄를 받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며 쓰러지고 그러다가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 형틀을 잠시 지어주는 장면과, 사형집행지점에 이르러서는 십자가에 달리며 지상사역을 모두 마치고 마침내 숨을 거둔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여인이 애통하며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옮기는 장면, 무덤에 안치된 장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한 부분이 20센티미터의 소품에 불과하지만 그속에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버린 메시야의 초월적인 사랑이 담겨있다. 어떤 ‘형상’을 새긴 작품이라기보다 ‘숭고한 희생’을 새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부활Ⅰ,Ⅱ>는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기념한 작품이다.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두 팔을 활짝 펴서 승리를 선포한다. 고난받을 때의 수척한 모습이 아니라 치켜든 두 팔은 세상을 다 껴안고 있는 확신에 찬 모습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부활>의 구도는 십자가 모양을 띠고 있다. 십자가란 예수 자신을 절망과 치욕으로 몰아넣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이 아니던가. 혹시 작가는 여기서 십자가의 죽음없이 부활의 생명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부활이 소중한 것은 무조건적인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래서 비참한 종말을 고한 줄로만 알았던 고난의 종의 영광스런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짓밟힘으로 세움을 얻었듯이 죽음으로 영광을 취한 역설을 표현하고 있다.

80년대의 강희덕은 어떤 굴레에 갇힌 군상을 통해 인간의 한계와 실존을 보여주었다. 90년대 이후로는 차츰 신음하는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 자유’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신앙이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게 믿음이란 단순히 구원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깨닫는 행위요 그것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기에 더없이 중요하다.

일찍이  중세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우월한 이성’(ratio superior)에 의해 영원한 실재를 향하여 가는 존재로 보았다. 우월한 이성을 통해 얻어진 인식을 ‘지혜’(sapienti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영원한 것에 대한 지성적인 인식을 뜻한다. 알기 쉽게 풀이하면 우리는 승화된 이성으로 얼마든지 영원한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희덕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면 ‘우월한 이성’으로 영원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인식은 산산이 부서진 언어조차 통합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의 궁극으로 집중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온유> 연작에서 그러하듯이 신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나타낸다. 이것을 단순히 신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동시에 진리의 앎에 대한 열의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아는 것만치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진리란 종국적으로 강희덕이 추구하는 영원한 형상이며, 정신위에 있고 정신을 초월해 있는 정신의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신적 조명이 안겨준 축복이며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은총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